
김세훈 현진권 이준형 김정수 이기호 양현미, 미메시스, 2008년 12월
스터디 기간 : 2020년 9월
내용
<공공성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본문 읽기 :
문학이나 예술 영역이 교회나 국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적 담론이 형성되는 공간을 제공하면서,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비판과 토론은 종종 작품 자체에 대한 논의를 넘어 국가나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들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 연계되었다. (pg.30)
Q. 우리나라에선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해?
뱀수
우리나라에서는 위에 내용보다 개인의 경험이나 감성 위주로 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이런 작업의 사례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그 분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각자가 경험했던 사례를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것 같아.
라임
나는 현대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엄청 많다고 생각해. 책이라고 하면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나. 풍자하는 것 도 아니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로 엄청난 갑론을박이 왔다 갔다 하고, 사회 모습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으로 연계되는 게 인상 깊었어. 이런 모습은 문학 작품에서 좀 잘 자리 잡은 것 같아!
짱소
나는 을지로 보존 연대가 생각나. 리슨투더시티에서 했던 건데, 개인들의 생활이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거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로 연결되었어.
준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미술관이라고 하는 것도 귀족들의 컬렉션을 혁명 이후에 시민들에게 열어 놓으면서 실제로 시민들에게 교육이 되기도 했고, 작품에 담겨있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이 시대 상과 연결 될 수 있는 거니까.
한편으로는 미술관이 이런 역할을 많이 하지 않나 생각해. 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고령화에 대한 전시를 하고 서브 행사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 21세기 미술관의 주요 기능이라고 이야기하고,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심포지엄에도 오늘 날 미술관은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룬 적이 있어.
본문읽기 :
공공 영역이 비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인식은 공공성 또한 이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pg. )
Q. 예술이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술 교육에서 말하는 예술은 비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예술 교육과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해... 학교의 교육자, 지도자는 이거를 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 이 내용을 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것일까?
준
중고등학교 교육에만 해당되는지, 예술 교육 전체인지?
뱀수
둘 다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 크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준
나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많이.
짱소
이게 안되는 게 상철 쌤 강의에서 의지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잖아. 의지가 없기 때문에 중요하다 생각하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다고 생각해.
준
라임이 교직 이수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 같아.
라임
우리나라 예술 교육은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고, 교양으로서의 어떤 지식? 그래서 나는 오히려 ‘예술에 어떤 공공성이 있는가’ 에 대한 지식은 어떤 공익을 가지는지 회의감을 가지고 있어. 학교에 있는 교육 지도자들은 예술 교육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거 같아….
준
진짜 아이러니긴 한데, 많이 관심 없는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예술 교육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거든. 안정적인 삶이니까. 그런 친구들을 많이 봤어. 부모님들은 안정적인 삶을 사는 친구들 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예술을 하면 각이 안 나온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학교 때 교직 이수를 하거나 교육 대학원을 가서 중고등학교로 가는 거지. 한편으로 사회 예술 교육이라고 하는 것들에는 나는 좀 다르다고 생각을 해. 물론 돈 벌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뒤에 보면 6장에 새 장르 공공 미술도 나오는데, 거의 문화 예술 교육 기획 중에 그런 느낌의 기획이 많거든. 오히려 이런 예술이 훨씬 낫다고 생각을 하고, 교육에서는 기능 주의 교육으로만 간다고 생각을 하면서, 현대 예술 자체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기능이라고 하는 그거 자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냥 아름다운 그림. 그런 것들이 이어져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예술 은 그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 같고. 중등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사회를 살아갈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인데 교육이 잘못되어있더라도 현장 최전선에 있는 선생님들이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 재 생산 되고 있다고 생각해.
본문읽기 :
<공공성>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존재한다. 공공성은 때로 <공공적 가치>와 같이 특정한 가치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공적 영역과 같이 특정 영역을 가르키는 데 활용되기도 하며, 공공 지원과 같이 국가 또는 정부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공공성은 사용되는 관점과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 지시하는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거나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공성 개념에 대한 <위로부터의 접근>방식은 공공성이 규율이나 질서, 통합과 같은 개념들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는 데 비해 <아래로부터의 접근> 방식에서는 자율, 비판, 성찰 등과 유사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특히 위로부터 접근이 주로 국가나 정부에 의한 접근 방식으로 활용되는데 비해, 이 접근은 시민 사회 내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하는 접근 방식의 유형을 나타낸다. (Bennett 1998: 194) 이처럼 어떤 내용을 지칭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양한 용례를 보이고 있는 공공성이라는 용어는 다양함만큼이나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나타내어,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의사소통에 있어 적지 않은 장애 요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pg.23)
Q. ‘공공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짱소
공원! 그냥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그래. 아니면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는 거?
라임
복지! 공공성이라고 하면 약간 모두가 행복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복지도 완전히 평등한 거 말고 어느 정도 차별적인 복지가 떠오르는 것 같아.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위치에 있게?
뱀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학교?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런가? 교육에 대한 평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학교 자체가 교육 공공성을 가지고 나가면서, 이에 대한 교육을 재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기업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서….
준
짱소는 물리적인 이미지였는데 라임, 뱀수는 일종의 평등과 관련이 있는 것 같거든? 너희들이 생각하는 공공성의 이미지는 평등에 가까운 거야?
뱀수
그런 것 같아.
준
공공성이라는 이야기가 좀 어렵거나 그러진 않았어?
라임
공공성이 관점에 따라서 해석하거나 의미가 달라지거나 하는 게 좀 신기했어서 흥미롭게 읽었어.
뱀수
공공성이라는 게 막연한 이미지였는데 막연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보이고 가려웠던 부분들을 긁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어. 친구들한테도 내가 그리는 그림이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어려웠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예전에는 그림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젠 조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짱소
나는 조금 어려웠어… 용어나 경제 이런 게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거랑 진짜 필드에서 하는 사용되는 거랑 음, 경제라는 단어 자체도 다르게 이해가 될 거 아냐. 그래서 내가 겪었던 경험 정도로만 이해를 하려니 완전 확실하게 이해가 되진 않았어.
준
나도 되게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막연한 이미지였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를 더 하게 된 것 같고, 학문 별로 이야기하는 공공성이 각자 다르잖아. 그러면서 동시에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거든. 사회학에선 일종의 합리성과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 같고, 경제학에선 공공재, 법학은 공공성이 절차와 정의였잖아. 행정은 공공의 이익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다음에 정치학 같은 경우에는 일종의 공론장? 표현? 그 다음에 사회 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일? 사회 공동체적인 부분을 많이 이야기한 것 같아. 마지막으로 미학 같은 경우에는 공공 미술로서 일종의 새 장르 공공 미술의 커뮤니티성? 이런 것들을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거는 평등, 정의, 행복 이런 거였던 것 같아. 각자의 해석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짱소
공원! 그냥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그래. 아니면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는 거?
본문읽기 :
이러한 점에서 공공 영역은 비판적 담론의 공간인 동시에 시민적 역량을 육성하는 교육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재규정된다. (pg.37)
Q. 시립미술관의 사례, 보기 불편한 예술작품에 대해 민원을 넣고 이를 이유로 행정이 검열하는 사례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준
서울시립미술관 백남준 센터에서 보기 불편한 작품들? 장애인이 자위하는 걸 찍은 영상 작업이 있었거든. 그게 장애인의 성적 자유에 대해 정치적이고 평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누군가 와서 왜 저런 불편한 걸 보여 주냐고 민원을 넣은 거야. 그래서 그런 게 또 검열 되고 그러거든? 이런 게 어떻게 해야 극복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고, 교육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까 그 교육에서도 오는 것 같아. 그냥 예쁜 게 예술인 게 아닌데, 내가 보기 불편하다 가 아니라 원래 이런 거라고 배우면 또 다를 것 같아.
라임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거든. 도덕도 그렇고 사람마다 다 기준이 다를 텐 데, 이거에 대해서도 보기 불편할 수도 있어. 그럴 수 있는데, 그럼 시민들끼리 이걸 기반으로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민원으로 처리 해 버리는 게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아. 보기 싫으니 치워라 하는 느낌인 것 같아서. 이게 시민성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예술이 정치적으로 이런 걸 끌어올릴 수 있다면, 공론장을 만드는 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이런 식으로 검열해버리면 예술은 무얼 지향을 해야 하는지… 행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준
라임 말에 동의하고, 행정에 있는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예술 행정은 사실 이해도가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술 행정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국회나 시 의회만 해도 이러한 문제 제기를 많이 하지 않나?
짱소
영국에서 어떤 작가가 건물을 본을 떠서 거리에 세웠는데 시민들이 흉측하다고 해서 없어졌던 사례 하나가 생각이 나네.
뱀수
교육이 답이다… 어릴 때부터 공론장이 계속 필요한 것 같아. 나는 이렇게 느끼는데 같이 이야기 해 봐야겠다는 인식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공공성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
본문 읽기 :
보조금 지원 방법은 수요와 공급을 통해 모두 가능하다. 먼저 수요를 통한 시장 개입은 앞에서 설명한 예술 재화의 외부성을 교정하는 수단으로 수요자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함으로써 수요자의 구매력을 더 높이는 것이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반면 공급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공공 부문에서 비교적 선호하는 방법이지만, 경제 효율적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다. 우선 공급자에게 지원할 경우, 공공 부문에서 반드시 보조금의 사용 실태를 감시, 감독해야 하므로 행정 비용이 많이 발생할 뿐더러 이러한 기능을 강화해야 하므로 감독 기능을 통해 정부 부문은 몸집 키우기가 가능해진다. 또한 수혜 받는 공급자 측면에서도 일종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시켜 생산성 높은 구조를 갖출 경제적 유인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pg.48-49)
Q. 위의 수요자 보조적인 측면으로 나타난 것이 문화 바우처나, 공공 예술 기관 무료 입장일 것이다. 경제적인 논리에서 보면,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하지만, 문화 바우처의 경우 지출처가 대부분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로 한정되고 공공 예술 기관의 경우 복지적 관점에서만 예술에 접근하기 때문에 예술가의 기여 등이 평가 절하 된다는 비판 또한 존재하고 있다. 물론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적인 선택"이 가장 중요하므로 그만큼 예술에 대한 수요가 없을 경우, 지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만 경제학에서도 ‘외부 편익'이라는 말로 예술의 소비는 개인의 만족 이상의 사회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문화 정책에 대한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뱀수
어쨌든 경제학에서 그렇다고 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관철 시킬 수 있는 논리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경제학에서도 외부 편익을 인정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소비에 대한 지원으로만 이루어질 경우 결국 수요가 발생하는 예술만 외부 편익이 인정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라임
보조나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면, 수요일마다 문화의 날 정해 가지고 할인 해 주잖아. 그런 것도 좀 생각이 나면서… 영화 같은 접근성이 좋은 게… 사설 갤러리에서는 입장료를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문화의 날이라고 할인 해 주거나 하지 않잖아? 근데 영화 같은 경우는 큰 기업이 얽혀있어 접근성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준
문화 바우처는 기본적으로 저소득층에게만 간단 말이야. 그러다 보니까 되게 그냥 대중 예술로 많이 가게 되는 것 같아. 영화 같은 경우 쉽게 이해할 수 있잖아. 근데 기초 예술 같은 경우에는 확실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한 접근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있고. 근데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도 팔릴 거 생각하고 예술을 하면 되지,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거든. 예술을 미술로 생각하고 상품으로 동일시하는데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한편에 공공 예술 기관 같은 경우에는 입장료가 없잖아. 그런 것들이 또 예술은 당연히 공짜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예술가들의 기여를 낮춰 보는 게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수요에만 보조를 해주게 되면, 결국은 팔릴 수 있는 예술만 혜택을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너무 이거는 예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본문 읽기 :
근본적으로 정부 제공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거래되는 메커니즘보다 훨씬 효율성이 낮다. 따라서 정부 제공 영역에서도 자발적으로 민간 자본이 투입될 경우에는 정부 제공보다 나은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방식이 민간의 자발적인 기부 행위를 들 수 있다. 많은 영역에서 기부가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예술 영역에서도 민간 영역의 기부가 활성화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우리나라의 경우 기부는 주로 재해와 교육 영역에서 활발하고 예술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기부 행위가 사회적으로 창출해 내는 편익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예술에 대한 기부자의 인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 (pg.97)
Q. 문화 정책 관련 자료집이나 논문에서 이미 본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나 가능한가?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여기서 기부가 활성화된 대표적인 것으로 재해나 교육으로 들었는데 재해의 경우 인간의 감수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용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교육만 해도 대학의 기부금도 소위 학벌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이러한 영역에서 기부가 잘 되고 있으니 교육에서도 잘 될 것이다 하는 생각은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 기부는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뱀수
시민들이 예술가들에게 기부를 아끼지 않는 세상?
준
그게 어떻게 가능한데요….
뱀수
교육…? 늘 끝은 교육으로 나오는 군….
라임
기부를 하면 세금을 깎아주자 미국처럼… 거대하게. 그니까 그런 제도에 대해 좀 홍보를 대대적으로 했으면 좋겠어. 기부를 하면 훨씬 이득이다~ 이렇게.
준
내가 보기에는.. 내가 세금을 학교졸업하고나서부터 어느 정도 내기 시작했잖아. 근데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한 개인 경험이 좋지 않아. 공무원들도 개편하려는 생각이 없어. 그러다 보니까 세금을 깎아 준다는 게 와 닿지 않는 거야. 근데 세제 혜택이라는 게 돈을 늘 만지는 사람들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라임 말도 어떻게 보면 동의하긴 하거든. 그리고 세금을 걷는 기관들도… 아 세금 걷는 기관은 싫어할까? 그래서 어쨌든 그런 것들이 되게 경험적으로 편해져야 하는 것 같아. 지금은 너무 어렵다. 한편으로는 문화 관련 책에서 문화생산협동조합이랑 예술인 조합이 있잖아. 근데 문화 소비 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거든. 신토불이나 국내 생산물을 홍보하는 소비 조합들처럼 문화 예술쪽도 좋은 소비 조합들이 생겨나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해보면 재밌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 게 요즘 트레바리나 그런 형태로 공간 기점으로 문화 소비의 경험을 늘리는 것들이 많아지면? 근데 지금은 전공자가 아닌 예술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예술가들이 조금 본격적으로 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본문 읽기 :
정부 팽창이 주는 또 다른 경제적 비용을 보면 정부는 절대 효율적으로 지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공공 부문의 비효율성이라는 용어로 많이 표현하는데, 같은 양의 재화를 생산할 때 민간과 공공부문이 경쟁하면 당연히 민간이 우월하다. 이는 민간 부문 사람들이 우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공공부문은 본질적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아껴서 사용할 유인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오히려 공공 부문의 유인적 메커니즘은 비효율적으로 많이 지출할수록 공공 부문의 사적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다. 즉 자원을 아낌으로써 얻는 사적 이윤과, 비록 낭비가 있더라도 무조건 많이 공급하여 공공 부문이 팽창하게 됨으로써 얻는 사적 이윤을 볼 때, 후자가 공공 부문의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데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따라서 공공 부문의 지출은 본질적으로 낭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pg.75)
Q. 시장 실패의 관점에서 정책이 예술가들을 많이 지원하지 않는 이유가 갤러리 시장에서 갤러리들이 예술가들을 지원하며 경쟁하고 시장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해?
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라임
지원할 가치를 못 느끼는 거지, 구체적인 아웃풋이 없으니까. 교육에서도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 중요성을 모르니까! 그 사람들도 모르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 예술의 존재의미가 뭔지, 가치가 뭔지, 왜 지원을 해야 하는지….
준
일단은 나도 동의하고, 물론 예술가 지원 정책이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아직 까지 경제 관료적인 가치관이이 과거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 이번에 코로나 터지고 뉴딜 정책이라고 하는 게 나왔는데 30년대의 미국 정책을 보는 줄 알았어. 구체적인 아웃풋이 있어야만 지원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 너무 구시대적인 거야. 그런 한 편 갤러리로 봤을 때는, 갤러리도 시장이니까 시장을 지원을 해야 하나? 갤러리의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 신진 예술가 발굴보다는 상업적인 데에 관심이 크니까. 도구합리성이라그랬나?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시장 가치도 너무 작고. 갤러리 입장에서. 그렇다고 또 시장에 개입하라고 하는 것도 경제학에서는 하기 좀 힘든 거잖아. 부분적으로는 도입이 되긴 했지. 제도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전속 작가 지원 제도였나? 작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나왔었지.
본문 읽기 :
공공 부문이 팽창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경제적 비용인데, 그 규모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높아져 경제 발전에 치명적인 장애 요인인 만큼, 감성적인 공공성이라는 정책 목표야말로 얼마나 큰 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지를 깨달아야 한다. (pg.77)
Q. 하지만 없어선 안될 정책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준
그 감성이라고 하는 것도 판단하기 나름이잖아. 감성의 영역은 경제처럼 딱 수적 영역으로 나눠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거든. 이러한 경제학적 주장들을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법학에서 보조 하거나 반론한다고 생각을 했어. 그 학문들에서는 평등을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경제학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잖아. 그래서 경제학이 주장하는 감성적 정책이라는 것도 정확히 무엇인지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일단 행정 효율화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브런치에서 읽었는데 공공 기관에서 영상을 만들면 얼마나 후진지 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보면 행정 효율화를 통한 경비 절감은 필요한 것 같아.
<공공성에 대한 법학적 이해 : 이유 제시의 규제 이념으로서 정의>
본문 읽기 :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소수자 보호나 절차의 제도 설계의 해결을 민주적 절차에 의한 결정에 맡길 수 없다는 점이다 … 무한 소급 논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행 절차에 따른 결정에 공공성을 인정하는 쪽이 이를 부인하는 쪽에 대하여 현행 절차가 공공성을 결여 할 정도로 현저하게 불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 현행 절차에 따른 결정이므로 공정하다는 식의 아집을 부리지 않는 한 - 실체적 가치 판단이 불가피 하다. … 결국 공적 절차가 공적 이유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이유가 공적 절차를 정의하게 된다. 공적 이유의 탐구가 어렵다고 해서 공적 절차로 이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pg.119)
Q. 현행법의 존재로만 정당성을 주장하는 일들이 떠올랐다. 이 챕터에서 법리적 관점에서도 절차의 정당성만이 공공성을 보장해줄 수 없다고 한다고 해서 인상 깊었다. 얼마 전 계원예술대학교 등록금심의위원회의 학생 참가를 막은 일이 떠 올랐다. 그렇다면 결국 권위의 문제 아닐까?
짱소
권위의 문제인 것 같아. 계속 다른학교에서도 이런 일들이 없었다 그러니까 안된다 너희가 참여하고 싶다면 절차부터 바꾸고 들어와라 이런 이야기들을 했거든.
준
그럼 앞으로 그럴 때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절차보다 공공성이 더 중요합니다! 법학적 관점에서는 절차가 공정성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근데 그래도 무시당하겠지. 우리에겐 권력이 없으니까… 답은 혁명이다….
<예술과 공공 행정 : 행정학 관점에서 본 예술과 공공성>
본문 읽기 :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정부의 개입 당위성을 주장할 때 문화 예술이 다른 목적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식의 도구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다. 문화 예술이 중요한 것은 그 자제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instrinsic value) 때문이지 다른 무엇인가를 달성하는데 좋다는 식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g.182)
Q. 이 논의는 6장인 예술학의 관점에서 공공성의 이해와도 이어짐. 도구주의와 예술의 내재적 가치의 갈등에 대해서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뱀수
안타까울 따름이지.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도구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을 이해 시키려고 하는 것이 힘들어. 심지어 우리가 그들을 설득 시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문화 예술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봐 슬프지? 정도인 게 짜증나.
짱소
도구적인 것도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해. 왜냐하면 예전에 생활 예술처럼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런 관점에서 일정 부분 도구적인 거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도구로 사용되는 것도 예술로 인해서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 그런 관점에서 도구적인 게 중요한 건데 이런 정부의 욕망에만 초점을 맞추어 도구적으로 생각하는 거는 모두를 배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준
양자 간의 밸런스가 중요한 것 같은데… 무작정 지원도 당위성이 없고, 예술을 도구로만 쓰는 것도 당위성이 없음.
짱소
이름만 커뮤니티 아트고, 참여한 사람들이 다 같은 작가라는 이유로 했는데 결국 작품에는 기획자 이름 하나만 적혀있는 것 보고 한 명이 독식하는… 말로만 그렇다고 생각을 했어. 균형은 어떤 식으로 잘 잡을 수 있을까?
준
대화와 서로를 인정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한편으론, 경험에서 나온 것도 있지만, 고정관념이 큰 것도 있어서… 우리나라가 공무원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진 않잖아. 오래전부터 한국의 근현대사 때문에 만들어진 거겠지만, 서로를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 누구는 이거를 '환대의 경험을 만든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본문 읽기 :
우리나라의 경우 현대 대중 예술에 비해 전통 문화 예술에 대한 수요는 매우 저조한 편이다. 따라서 전토 예술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부르짖어도 시장 원리에 그냥 맡겨 두면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전통 예술은 보전 되지 못하고 점차 고사해 버리고 만다. (pg.188)
Q. 나의 경우 현대미술 전공이기 때문에, 유물론적 관점의 발전 사관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통의 경우에도 그것이 가지는 가치는 이해하지만, 계속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국악의 크로스 오버와 같은 음악적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다. 한 편, 전통 예술의 보전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이를 낮잡아 보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러한 과거의 보존과 현대적 발전의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각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뱀수
이것도 마찬가지로 많은 대화와 서로를 인정하려는 노오력이 필요할 것 같아 ㅎㅎ.
준
그럼 지금이 노력이 되지 않는 이유는?
짱소
서로를 환영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자기의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준
그런 아집은 예술가들이 좀 큰 것 같아. 왜 그럴까?
뱀수
예술가들의 고집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는데, 남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밀고 나가야 자기가 생존할 수 있게 된다는 관념이 있으니까. 그게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되는 것 같아.
짱소
근데 그게 '내 것만 맞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인 거지. 나에겐 이런 독창성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겐 저런 독창성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근데 그것도 내것만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닐까? 자기 독창성을 가지고도 다른 독창성을 인정할 수 있는데, 그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 자체가..
준
협업의 경험이 일단 없는 거 같아. 협업에 대해 학습하지 않아. 협업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거에 대해서 없는 것 같고, 뱀수가 말한 것처럼 판타지가 있는 것 같아. 협업에 호의적인 예술가 상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짱소
그것도 교육 때문인가?
준
일정 부분 있겠지? 답은 교육 혁명이다~~! 근데 그런 한 편, 예술계가 연예계처럼 승자 독식의 세계인 느낌이 있거든. 예술대학에서 배운 예술계라고 했을 때. 그러다 보니까 상호 인정이 잘 안되는 것 같아. 시기나 질투도 많고, 그리고 전체 파이가 정말 작잖아. 그래서 더 경쟁적으로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 독선적인 게 커지는 것 같아.
짱소
승자 독식이 아닌 곳이 있을까? 자본주의가 문제인가?
준
공무원? 들어갈 때는 경쟁적이긴 하지. 들어가고 나서는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본문 읽기 :
세계 각국에서 시행되는 문화 정책의 변화 추세를 살펴보면 엘리트주의적 성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대신 일반 시민들의 문화적 참여가 강조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90년대 이후 문화 정책의 지향점으로 문화 향수권, 문화적 민주주의, 문화 복지 등이 부각되어 왔다. 그런데 문화예술의 향수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문화 예술의 창조가 전제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문화 예술의 생산만 이루어진다 하여 자동적으로 충분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문화 예술에 대한 공공 지원의 딜레마가 제기된다. 즉 소수의 예술 엘리트들의 창작 활동 지원과 다수 시민들의 문화생활 지원 사이의 갈등이 야기 되는 것이다. 문화 정책에 있어 일반 시민들의 문화 향수권 확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일단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문제는 예술 부문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공적 자원(재정, 시설, 인력 등)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 시민의 문화 활동에 대한 공공 지원을 늘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문화 활동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물론 전체 예산 규모가 커지면 둘 다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지원 총액에 상관없이 양자 간 얼마 씩 배분해 줄 것인가 라는 측면에서 보면 항상 제로섬 게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g.197)
Q. 이제는 조금 해묵은 문제이기도 한 것 같은데,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행정의 입장에서는 공익 =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게 맞는 것 같지만, 예술의 내재적 논리와 발전을 보게 되면 아니기도 하다. 글에서도 지적 했 듯 나는 제로섬 게임, 파이의 문제라고 보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고, 이 딜레마를 해결할 아이디어 같은 것이 생각나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뱀수
나는 최소 조건을 만족한다고 하면 그리고 그 만족 시키는 작가들이 파이보다는 크다고 가정하면, 그 안에서 특정한 인원에 몰아주기 보다는 최대한 다양성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짱소
나도 다양하게 지원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준
파이를 늘려야지 뭐… 어떻게 늘려야 할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인정 받는 수 밖에 없지.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 파이가 늘어나니까. 근데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면 교육이 중요하고! 파이를 늘리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지. 주어진 파이에서 만족하지 않고, 예술도 노동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받는 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파이를 넓히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 관점에서 예술가들이 파이를 늘리기 위한 싸움을 할 때, 사회적 인정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해야 하잖아. 예술의 발전적 원리에서 예술을 지원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너무 엘리트 중심적으로 가게 되면 다시 괴리가 생기는 거지. 그런 게 중요한 한편 예술가들도 엘리트적인 거를 버리는 게 필요한 것 같아.
짱소
조금 다른 얘긴데, 이번에 수강 신청 할 때 보니까 다 엘리트 주의 수업 밖에 없더라. 지난 학기엔 현장에 계신 선생님이 오셨었는데, 이번 학기엔 현대 미술하면 떠오르는 직업들 작가, 큐레이터처럼… 교수님도 약간 아카데믹한 수업이 될 것 같다고 말씀 하시기도 했어. '예술사회의 제도학'이란 제목의 수업인데, 안에서 배우는 건 예술 사회 보다는 이런 제도 안에 존재 하는 것들에 대한 내용이었어.
본문 읽기 :
엘리트 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술적 수월성이 문화 정책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 자금의 지원은 마땅히 탁월한 수준의 예술을 창조해 내는데 기여해야만 한다. … 이런 점에서 예술 창조의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 다수의 <그저 그런> 예술가들보다 소수의 재능 있는 천재가 훨씬 더 큰 몫을 한다. … 이런 패러다임에서 보면 문화 정책의 패러다임이 <창작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는 것은 <(심미안이 낮은) 소비자가 (심미안이 높은) 생산자보다 주도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인 것이다. (pg.198)
Q. 우수한 것을 지원하느냐 마냐 보다, 예술적 수월성을 행정적 입장에서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지가 궁금하다. 나는 한 편으로, 그 수월성이라고 하는 것이 권위에 기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카르텔로서 작동하고 정말 수월성이 높은 예술을 판단할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뱀수
준이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하는데, 대안이 떠오르지는 않아… 동료 작가들이 평가 해주는 것도 방법일까?
준
대안적 평가 방법들이 요즘 제안 되고 있긴 하는 것 같아. 상호 평가라고 해서 그런 것들이 조금 실험 되고 있긴 하거든. 청년예술청도 이번에 그런 식으로 인원을 뽑았고. 근데 기본적으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 건 사실이지. 그래서 편의성만 생각하지 않고 왜 중요한 지를 사람들이 잘 생각하게 해야 할 것 같아.
본문 읽기 :
중요한 것은 사용할 수 있는 가용 자원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자원을 되도록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도출된다. (pg.)
Q. 앞서 경제학에서 정부의 지출이 절대 효율적일 수 없다는 내용과 상충되는 듯 하다. 정부 지출이 효율적이지 않는 것이 효율적이란 건가? 이 부분들을 어떻게 이해했어?
준
나는 여기가 경제학이랑 겹친다고 생각했었던 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건 비효율성을 초래한다고 읽었거든. 그니까 계획은 되게 효율적으로 적절한 곳에 해야 한다는 게 도출됐었는데, 경제학에서도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도 자원이 한정적이니까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봤거든. 근데 그 효율이라는 게 행정에서는 조금 다를 수 도 있을 것 같아. 행정에서는 효율이라는 게 경제적 가치 이런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들까지 고려한 효율성이라고 판단이 되는 것 같거든.
본문 읽기 :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는 손해가 되는 일, 희생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 그 토대 위에서 다른 개인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편하게 해나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의 편의를 위해 때로는 손해 나고 때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들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공적 영역이다. 따라서 공공성의 본질이란 이윤이 나지 않는다 해도 불특정 다수의 이익을 생각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내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pg.154)
Q. 우리들(예대넷)이 공무원이 되자.
준
근데 또 공무원이랑 또 달라. 공무원이 아닌 공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시민 사회 활동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 올해 진지하게 3,4월쯤에 공무원을 해 볼까 생각을 했었는데, 근데 이 역할에서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술가나 아니면 활동가로서. 그래서 안 했어 ㅎㅎ (귀찮은 것도 있음).
본문 읽기 :
공공성의 발생
1) 외부성이 높은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 활동
외부성이란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어떤 재화 혹은 서비스가 제공될 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소비할 수 있는 특성을 말한다. 예컨대 누군가 열심히 노력해서 깨끗한 환경, 튼튼한 국방, 안정된 치안 등을 확보하면 그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
…
5)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
국민들이 행복하고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재화 및 서비스들도 공공성의 영역에 포함된다. 예컨대 교육, 주거, 교통, 의료, 문화, 보건 등은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서비스이다. 그런데 시장에서 사기업들에 의해 이러한 서비스가 모든 국민들에게 골고루 제공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필수 재화 및 서비스를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공적 사업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pg.158-159)
Q. 아니 애초에 사실 5번에 있어서 예술이 국민 생활에 왜 필수적인지 사실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예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꾸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건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하는 예술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혹은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예술이 행복하고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뱀수
나는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창작자로서는 밥벌이니까 필수적이고, 예술 작품을 하면서 매슬로 욕구 단계에서 최고 단계에 있는 자아실현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필수적이라고 생각을 해. 꼭 필요하다 라기 보다는 없는 세상이 상상이 안 가는 느낌?
짱소
예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있고,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있다고 하면 그 나와 환경의 접점을 찾아주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그 접점이 없으면 고립돼서 죽을 테니까….
준
라임이 얘기한 거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냐 라는 질문인 것 같은데, 책 첫 부분에 행정학에서 왜 예술이 필수적인가 라고 했을때 기본적으로 물건을 살때도 예쁜거를 사려고 한다는 거지. 그래서 인간의 미적 욕구는 기본적으로 있는 거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잖아. 근데 아까 예술을 통해서 공론장이 만들어지고 하는 거니까. 생활이라고 하는 걸 생존 정도로만 본다면, 필수적이진 않겠지만, 생활이라고 했을 땐 필수적인 것 같아.
Q. 예술가는 내가 하는 작품이 가질 공공성을 염두하고 작품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본인이 좋을 대로 작품을 하고 뭔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고 그걸 제공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데서 끝인 걸로 해야 할까?(그러니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인가?) 어떤 게 예술가로서의 태도로 바람직한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지향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뱀수
이 것에 대해 고민 중, 내가 이것에 대해 작업할 필요성을 느끼면 할 것 같기는 해.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로 즐거움을 많이 느끼고 있는데 세계에서 나타나는 많은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표현을 하게 되면 ‘예술가’가 되고 아니면 그냥 ‘창작자'인 것 아닐까?
준
그러면 뱀수가 생각하기에는 공공 영역의 이야기로 작업이 확장됐을 때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뱀수
그런 것 같아. 반면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가 내 작업을 통해서 그런 게 생겨난다면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준
흥미로운 구분이네.
뱀수
반대로 또 생각을 해보면,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와 작품을 세상에 내놨으니까 담론화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정도는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술가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자기가 정의하기 나름?
짱소
나도 뱀수랑 비슷한 것 같아.
뱀수
친구랑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할 때 친구가 이야기해준 것이 있는데, 친구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데, 그 친구한테 다른 사람이 페미니스트냐고 물어볼 때? 당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어떤 사람 인가요?라고 질문을 한데. 그게 자기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랑 맞다면 페미니스트라고 인정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아니라고 한다던데.
준
예술가는 일단 자율 노동이잖아. 그러면 애초에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할 수 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공공성이라는 게 공적 영역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염두에 둘 순 없더라도 자기의 작품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는 생각을 하고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러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작품들이 표현의 자유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보고, 작품이 세상에 나가는 그 순간부터 공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 작품이 어떻게 해석될 것 인가의 고민이 없다면, 너무 책임감 없는 작업이 될 것 같아. 뱀수가 그림을 그리고 나서 다른 누군가 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고 하면 그건 공적 의미를 이미 가지게 된 거고. 예술가가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야 하는가 라는 게 예술과 정치의 공통점이 시대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거라고 하거든.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느낀 인식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면 굳이 공공성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이미 공공성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공공성까지 작업을 넓히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본문 읽기 :
4) 미래의 이익이나 효용성
어떤 재화나 서비스는 비록 지금은 수요가 없어 생산할 필요가 없거나 혹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해도 미래의 효용도를 위해 생산되어야 할 경우가 있다. 이때 장래의 효용이 곧 공익으로 간주된다. 즉, 지금 당장은 손해 나는 일이라 해도 미래의 효용이 기대되는 한, 공익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시장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한 재화·서비스 중에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예컨대 전통 예술이나 기초 학문의 경우 사회에서 당장 큰 수요가 없다고 해서 그냥 방치해 두면 곤란하다. 비록 현재의 효용 가치가 매우 적다고 해도 장래의 이익을 위해 우선 당장은 손해 나는 일이라 해도 공익 차원에서 포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래의 효용이나 이익은 단순한 상품적 가치나 경제적 이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한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나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 효용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pg.167)
Q. 예술이 공공성을 띄고, 공익을 띈다는 전제 하에, 예술을 하는 것이 당장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스스로 희생을 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러니까 외부 지원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예술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뱀수
본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
준
예술가가 공무원이 아닌데 공익을 강제할 순 없지. 위의 공공성은 너무 한정된 공공성 아닐까?
예술한테 그런 거 요구할 때 있거든. 지원 사업을 보면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 문화활동지원사업도 보면 문제해결을 요구해서 부담스러웠거든. 해결 시도나 단계일 순 있겠지만 해결은 잘 모르겠네.
<21세기 공공성의 정치학적 재구성>
본문 읽기 :
예술과 정치가 공유하고 있는 표현, 소통, 상상력, 상징 등의 키워드는 시대가 변화해도 빼놓을 수 없는 기본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공통점은 한 사회의 정신을 드러내고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반영함은 물론 동시대인들이 지향하는 바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성>을 잠재적 속성으로 포괄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술과 정치는 어떻게 공공성을 획득하는 것일까. 예술이 만드는 공공성과 정치가 만들어 내는 공공성은 어떤 지점에서 서로 만나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일까. (pg.240)
Q. 이번 장에서는 예술과 정치가 본질적으로 의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기원이 같다고 주장한다. 이 글을 읽으며 <현실 정치>가 아닌 <원래 정치>의 복원, 정치 혐오, 예술 교육 과정 내에서 탈 정치적인 주문 등,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이 장에서 여러분들이 든 생각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라임
정치파트가 어려웠어.
짱소
우리가 하는 공론장 등의 중요성, 가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
라임
정치라는 것이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 즉,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정치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예술도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있는 과정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짱소
정치라는 게 예술이란 관련될 수 있는 지점들이 많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저항, 개입, 창출 이라고 하는 책에서 다룬 3가지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도 저 3가지 지점에서 재정립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준이 이야기 한 것 중에 우리가 하는 활동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이야기가 기억이 나는데, 교차점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또 이전에 운동팀에서 “왜 우리 세대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야기 했던 “먹고 살 것이 확보가 되어야 한다” 또 계원예대 총학생회에서 학생회 집행부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는데, 그 부분과 연관되어서 생각도 해보았어.
라임
정치 혐오 하니까 생각이 든 건데 정치도 예술도 똑같이 메세지를 담는다는 책의 구절이 공감 가는데, 왜 현실에서는 그 두 가지를 칼 같이 나누는 건지 의문이 들었어. 대학에서 든 어디에서 든 예술 교육을 하고 있다면, 예술이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짱소
계속 나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느꼈어. 어릴 때부터 정치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지금과 많이 다를 것 같은데, 교육에서 그러한 역할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아. 책에서 일상 문제를 풀어내는 공간으로서 공공 영역이 형성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건 아래에서 위를 구성한다는 말인 것 같아. 그렇다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어떨까?
라임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공공성이라서 임의적인 것 아닐까? 만들어지는 것이랑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것 아닐까?
준
법학에서 나오는 거랑 비슷한 거 같아. 법학 파트랑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니까 거기서 이야기 하는 게 다수가 다수의 이익이 결국 공공의 이익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본질적 정의가 중요한 것 같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공공성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정의나 공공의 이익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중요한 거지. 그런 의미에서 정치나 정당이 있는 것 같다 고 생각해. 정당의 핵심 가치나 강령들이 있거든. 근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현실 정치에서 정당의 색채보다는 포퓰리즘 적으로 가는 것 같아 정치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공공성이 확보하는 과정에서 법학의 소수자 문제 접근 가능성이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문 읽기 :
예술과 마술의 관계를 좀 더 풀어 설명하면, 예술은 사람들에게 시대적 동질감 혹은 시대 정신을 공유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예술 영역은 공공 영역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이를 잘 느끼지 못할 때, 훼손된 정도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예술은 미래의 모습을 우리에게 경고하기도 하고 희망을 주기도 하며 절망으로 자극하기도 한다. (pg.246)
Q. 예술이 시대 정신을 내포한다는 말을 바탕으로 할 때, 오늘 날 한국 현대 예술이 다루어야 할 테제는 무엇일까? 생각해본 것이 있는지?
준
기본적으로는 현대사회에서 첨예하게 부딪히는 이슈들이나 지점들 이겠지만 더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
짱소
최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에코 페미니즘 강연을 듣다가. ‘질병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어. 이건 질병에 걸려도 회복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권리를 이야기하는데, 이걸 건강권이 아니라 질병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시더라고. 미디어에서는 개인의 책임으로 문제를 돌리는데, 정말 질병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하는 비판적 의식 속에서 나오게 된 단어래. 여기서 질병은 사회의 다양한 이유로 걸리게 되는 것이라 이야기. 예를 들어 하루에 맥주 1캔씩을 먹다가 암에 걸렸는데, 맥주를 계속 마신 이유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생계 유지를 위해 그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인 거지. 또 이 이야기자리의 주제는 돌봄이었는데, 돌봄두레의 예시도 이야기 해. 그런데 사회적 제도 내에서는 직계가족만으로 보호자가 한정 되잖아.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구성권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는데, 이 것도 테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
준
나도 들으니까 기억나는 게, 현대사회에서 가족 구성원이 이슈잖아. 탈 가정이랑도 이어지는 거 같아. 가족이 남보다도 못하는 사이인데, 법이 직계가족으로만 짜져 있으니까. 내가 병원에 갈 때, 유산을 상속해야 할 때 문제가 생기잖아. 돌봄 이슈도 있지만 현대 사회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들이 전통적 가족이 붕괴하면서, 나타나게 된 새로운 모습인 것 같아.
짱소
재난 지원금을 받을 때에도 개인에게 간 게 아니라 가족 구성원에게 간 것이다 보니 청소년들이 탈 가정을 했는데도, 본인이 받을 수 없는 문제들도 있지 않을까? 의무나 책임이 아닌 자발적으로 형성된 돌봄. 다른 이야기 이긴 한데 폴리 아모리 에세이집을 받았는데 재밌었다.
준
새로운 모습의,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 새로운 의미의 가족 구성권.
짱소
또 생각난 건데 우울증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견해이긴 하지만, 타고난 특성이 아니라 기질이라 암이랑 비슷하다고 이야기 하시더라고. 기질은 가지고 있지만, 특정한 조건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안 나타날 수 있다는 거지.
라임
우울증 하니까 든 생각인데, 요즘은 우울증을 극본 한다는 말보다는 함께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게 요즘 흐름인 것 같아.
준
정상성에 대해 우리가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족도 그렇고 극복이라는 게 ‘정상성’이 있다는 말이잖아. 예전에는 정상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정상성이 해체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새로운 테제인 것은 아닐까? 새로운 가치의 출현. 정상성의 해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취직 때문에. 생계 유지. 생살여탈이랑도 연관이 있는 거지. 중요한 가치고 생각은 하는데, 과연 얼마나 되고 있느냐는… 또 잘 모르겠긴 해. 점점 담론으로서는 나오고 있는데, 심리 사회 영역에서는 잘 나오고 있는 것 같고. 시민 사회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되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되게 큰 정치적 이슈들, 중심으로 제도나 이런 것들로 했었다면 요즘엔 되게 일상에서부터 다가가는 것 같아. 그런 의미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술 대학을 바꿔야 한다 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교육이라는 게 우리가 하고 있지만, 차등 등록금이 합리적이다 아니다를 넘어서 교육에 돈이 필요하냐, 그게 왜 정상인 건지. 그게 과연 정상인가부터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작가, 예술가들이 이런 고민 많이 해야 해. 공공 영역이라고 이야기 하잖아 정치나 예술, 사회학에서도. 그렇다면 예술은 공공 영역으로서의… 국현에서 성소수자 전시도 그런 의미겠지.
본문 읽기 :
대의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 권력과 정치 과정에 대한 정치학 개념은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먼저 형식적 차원에서 정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체계의 지배적 원리인 제도로서의 대의제가 관료적일 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박탈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의회와 국가 권력은 실질적으로 국민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일상적인 정치 참여의 기회를 보장할 수 없어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가 점점 쌓여 가고 있다. 벤저민 바버는 대의제는 자유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대의제가 진정한 자율 통치와 자율성을 희생 시키고 정치적 의지를 위임함으로써 소외 시키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곧 대의제 체제하에서는 투표하는 날만 자유로울 뿐이며,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불행 하게도 개인의 자유를 포기한다는 역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g.217)
Q. 질문은 아니고.. 여기에 동감하는지, 앞으로 방향성은 어떠해야할지 등의 생각이 궁금했어.
준
나는 완전 동감.
짱소
이전에 운동팀에서 이야기 했었던 ‘참여의 단계’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 같아. 서명했다는 것만으로 끝나버리는. 기분만 느끼고 개인의 자유를 포기….
라임
맞는 것 같은데, 비슷하게 하는 이야기가 청와대 청원 하는 것 있잖아. 내가 무슨 이슈를 해결하는 데 일조한 것 같은 기분만 내고 그걸로 끝나게 하는. 그 이상의 것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 난 관심 있어서 했어~ 정도로 끝나게 하는. 개인이 어떻게 더 정치에 참여하고 이런 것들을 막아버리는 것 같아. 그게 없으면 더 고민을 해서 실질적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는. 삼권 분립 나라에서 청원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정치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을 내게 해주면서, 실질적으로 그게 아무 소용이 없는. 투표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아. 절 뽑아주시면 이런 걸 하겠습니다, 했는데 내 손을 이미 떠난 거잖아.
준
나는 예전보다는 청와대 청원이라고 하는 게 더 참여의 기회를 연 것은 맞다 고 생각해. 일상의 공론장을 발생 시킨다는 의미에서 옛날보다 낫다고 생각해. 근데 그게 결국에는 공론장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에 공론화 되었을 때 해결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 그 해결을 담보하지 않은 것들은 그냥 통치술 이라고 생각하거든. 청원도 그런 느낌의 그냥 소통하고 있다는 것만 부각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해결이 담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만 나오니까, 이거 여기서 말해봤자 뭐해,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 하는 거야. 이게 기존 정치에도 있었던 것 인데, 해결이 되려면 기득권 해체해야 되겠지. 해체의 근거는, 법학에서 말했던 ‘정의’라고 생각해. 좀 더 공공성의 관점에서 기득권을 해체해야 하겠지. 정말 쉽지 않은 길이고. 일상적으로 보는 학생회가 딱 이렇다고 생각해. 거버넌스가 국가교육 회의 등으로 엄청 많이 만들어져. 예술 쪽은 특히 많고. 이전 정부가 너무 권위주의적인 행정을 한다고 생각해. 참여 이끌어내는 거버넌스. 그 거버넌스가 형식적으로 작동해야 하지 않겠지. 국민청원도 ‘시민들의 정치참여’라는 이유로 거버넌스긴 한데 그게 요식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거고. 시민이 참여해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기본적으로 타자성이 내제 되어 있는 거에요. 문제는 니가 해결해야지. 내가 왜 시간 내서 해결해야 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좀 더 책임을 가지고 같이 해결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해요.
짱소
결국 공동체가 중요하다…. 로컬도 그렇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도 그렇고, 교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대안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을 통해서 공적 영역이 확장되지 않을까? 하며 중요하겠다고 생각해.
준
그럼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어떻게 가시화시키고 담론에 접속시킬까가 새로운 과제일 수 있겠다.
<예술에서 “퍼블릭” 개념의 변화에 관한 고찰 : 공공 미술을 중심으로>
본문 읽기 :
연방 미술 프로젝트는 예술적인 질과 완성도보다 경제적인 구제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신진 미술가나 미대 학생, 더 나아가 아마추어들에게도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질 낮은 작품을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연방 의회의 다수 의원들이 예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사업을 계속 지원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과 의문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작품의 질이 낮아서라기 보다는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할 것이다. (미국)재무부가 지원한 순수 미술 프로젝트의 경우 대부분이 구상 작품들이었던 것과 달리 연방 미술 프로젝트는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방 이원들이 나쁜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고 보았던 벤 샨, 윌렘 드 쿠닝, 데이비드 스미스, 조지프 스텔라 등이 공황이 끝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각종 미술제를 석권하며 미국 미술을 세계 미술 강자로 끌어올린 주역들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g.261)
Q.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것이, 당대의 의식의 수적의미에서 가장 보편성을 띈다면, 민주주의적 입장에서는 다수와 보편성 자체가 민주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현대 민주주의는 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들의 요구가 검열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 분명히 문제이며 이러한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 필요할 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엘리트리즘에서 구분하는 태도들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짱소
지난번 스터디 할 때 이야기 나눴던 “문화의 민주화” vs “문화민주주의”도 생각이 나.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 교육은 장르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장르가 아니라 예술로 감각 하게 하고 괴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 아트 인사이트 (짱소가 하는 다른 활동)는 글로 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이 들었어.
준
최근 들은 예술 교육의 내용을 보면 장르적으로 하지는 또 않는 것 같아. 생활 동아리를 보면 약간 장르 중심적이기는 한데 예술가들이 예술 교육 기획자가 되어서 여는 그런 교육들 있잖아 그건 좀 다른 느낌이었어.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게 예술이야? 할 수 있는데, 장르 중심적으로 생각하면. 근데 그게 되게 예술 같았거든. 그런 교육들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 장르 중심적인 교육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정의. 사회학이나 학문 별로 예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잖아. 사회학은 비판적 담론 제시와 함께 시민 교육의 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정치에서는 표현의 장. 시대 정신. 공동체의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장. 그런 본질적인 예술의 역할, 기능에 둔 그런 교육들이 많아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초중고의 예술 교육이 혁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본문 읽기 :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은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여 그들 스스로 환경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지역 재개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공공 미술의 패러다임도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은 미술과 시민 사이이 커뮤니케이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공공 미술 (건축 속의 미술, 공공 장소 속의 미술, 도시계획으로서의 미술)과 차이가 있으며, 오늘날 미술 비평가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의 공공 미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1970년대 미국의 주민 벽화 운동과 1980년대 시카고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pg.284)
Q. 정책적 용어인 ‘지역문화' 속에 매우 많은 것들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 분권,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 과 접근성 증대, 새 장르 공공 미술 혹은 예술, 예술 교육,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 개인적으로는 지역 문화 정책을 의미 있다고 바라보고 있는데 한 편 ‘지역 문화'라는 키워드 안에서 정리되지 않고 혼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예술가들에게는 ‘지역 문화 프로젝트'라는 것을 할 때 혼란을 좀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정책 내에서도 세부 분류가 필요한가? 아니면 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지금이 나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참여 경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역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눠보고 거기서 갈무리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짱소
공동체가 중요하다….
준
공동체 빌런임…?
짱소
최근에 준에게 선물한 지역 관련 책 <슬기로운 뉴로컬 생활>의 내용 중에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지역 문화라고 하는 것은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의 장이지 않나. 지역 문화가 그런 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오래 살았는데, 지역의 문제는 인프라의 존재 유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는 가의 차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야.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시도들이 많이 생겨야 할 것 같고 그것이 지역 문화라는 생각이 들어.
준
이 책의 정치학 파트를 보면,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생활 세계 속에서 공론장을 만드는 것들이 중요하든 이야기를 해. 그게 지역 문화라고 하는 게 일상 세계의 공론장이라고 생각하고. 제도 속의 공론장들은 너무 머니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공론장! 지역의 이야기를 다루니까. 내가 감각 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하는 게 ,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무너져있잖아.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사람마다 너무 다르고. 잘 되어있는 가정도, 안되어 있는 가정도 있으니 논외로 치고, 지역 공동체가 옛날 보다 망가져 있는 것 같아. 지역 문화라고 하는 건 그것들을 회복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옛날에 지역에 결혼하면 잔치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 그런 것들이 누군가의 경사가 마을의 축제가 되었던 것처럼. 축제나 이런 것으로 묶이게 되는 것. 지금의 지역 공동체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본문 읽기 :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이 공공 미술 개념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지역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술적 실천의 방법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은 미술과 삶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모더니즘 미학을 넘어선 대안 미술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은 공공만 있고 미술은 없다. 정치적 표현이나 참여이지 미술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pg.290)
Q. 작년에 뱀수와 함게 <포스트! 로컬리티>라는 새장르 공공 미술 관련 기획을 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역 문화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이름을 붙인 게 부끄럽기도 한데, 어쨌든 느꼈던 것은 공공 미술의 경우 재원이 필요하고, 새장르 공공 미술의 경우에는 재원에 더불어 지속적인 커뮤니티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어서, 하고 싶다고 해서 하기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교육 과정에 있는 사람은 더 그렇고…. 한편, 다른 예술 교육 관련 논문에서는 이러한 공공 미술들이 예술 대학 과정에서는 담아내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정규 교과 과정에 담아내기는 힘들다는 임민욱 작가의 글도 보았다. 이러다 보니 예술을 더 좁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대안적인 방법이 있을까?
준
계속 산학협력 이야기를 하는데 대학들이 엄청 강조하잖아. 예술에서는 산학협력할 수 있는 게 이거라고 생각해. 실제로 유럽 같은 경우에는 졸업 전시나 행사가 그 지역의 중요 축제가 되기도 하고. 지역 주체들과 협력해서 과정들을 만들면 되지. 안 하는 이유는 뻔한 것 같아. (능력이 없어서) 못 해서 (의지가 없어서) 안 해서… 독일은 졸업 전시가 공동체 축제처럼 생각되기도 한다더라고.
짱소
지금 <공공 미술 프로젝트>라는 수업을 학교에서 듣는데, 가관이야. 그냥 자기가 공공 미술로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구상해오기야. 나는 대학 교육의 공공성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럼 너가 공론장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준
방향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론에 기반한 제대로 된 피드백을 못해주는 게 문제 같은데?
짱소
그래서 블랙리스트 관련 공론장을 열어보려고.
준
책에서는 공공미술 이라고 하는 게 건축 장식 속의 미술 > 공공 공간 속의 미술 > 도시계획 속의 미술 > 새장르 공공 미술 이 공공 미술의 과정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요즘에는 공공장소보다 공공 영역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의미인 것 같아. 공공 영역이라고 하면 사회학에서 이야기 했던 공동체의 일종의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이라고 이야기 해. 그런 이론적 내용을 조금 다루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짱소
그리고 교육에서 공공 미술에 들어가는 인적, 물적 재원이 많은데 그걸 학생이 다 부담하라고 하는 것도 넌센스야.
본문 읽기 :
포스코는 1997년 테헤란로에 있는 사옥 앞에 17억 원을 들여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을 설치했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계의 초기 반응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제철 기업인 포스코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시민 반응이었다. 거리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작품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고, 결국 이 작품은 철거 논란이 일다가 옆으로 옮겨진 뒤 주변에 나무를 심어 가려 놓은 상황이다. 이 사건은 예술가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도 공공 공간에서는 시민의 미감과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pg.294)
Q. 공공미술이 가지는 난제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앞서 정치학적 관점의 공공성에서 바라본 것처럼 정치와 예술이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공동체의 미감 자체가 높아져야하는 것이 해결 방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걸 교조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짱소
토론이 중요할 것 같아.
준
근데 이 토론에는 예술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참여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이 참여 안 하면?
짱소
그럼 말하지 말라고 하는 수 밖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면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준
결국 교육 밖에 없나… 대안적으로 생각해보면 공적 교육에 개입할 수는 없으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것도 교조주의적인가? 그럼 체감형 컨텐츠로…. 너무 지금은 장르적으로만 예술을 이해하니까 그런 것에 대한 대안적인 교육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어렵다. 고민해봐야 할 듯. '널 위한 문화예술'은 스토리텔링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던데, 기획을 잘해서 이슈-스토리텔링의 방법으로 교육을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체 내용을 아울러서 …
Q. 이 책은 문화 정책에 있어서 공공성을 다루었다. 한 편 교육 정책에 있어서 공공성도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 이 책을 바탕으로 교육 공공성에 관해 든 생각이 있다면?
준
사회학적 의미에서 공공성은 비판적 기능 및 시민의 형성을 담당하는 공공 영역의 중요성이었고 법학적 의미에서 공공성은 ‘누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철학적 의미에서의 ‘정의’와 자유의 중요성의 관점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는 것, 행정학에서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의 공익과 평등, 정치학에서는 공공 영역에서 공동체의 덕이라는 관점에서 공론장의 중요성이었어. 이런 의미에서 바라 볼 때, 독일의 경우에는 대학의 역할을 ‘사회 비판’이라고 정의하고, 이게 68혁명 이후의 관점이야. 대학 평가와 학점 엄정성이라고 하는 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 자체의 의미보다 산업에서 요구하는 것에 가까운 거라고 생각하거든.. 우리나라는 산업에 대학이 종속되어 있는 거지. 교육 공공성보다 대학의 공공성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교육 공공성으로만 생각하면 학생으로서 당사자 논리에만 한정되는 것 같은데, 대학의 공공성은 이를 전환하는 개념이니까. 공공 영역으로서 사회에 비판적 지식을 제공하는 기능을 대학의 역할로 상정하고, 그 교육을 받는데 있어서 정의와 평등의 관점에서 차별이 없도록 하는 것이 교육 공공성에서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짱소
이러한 개념을 공공 예술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각색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 예대넷 운동팀에서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데, 그러다 보니 ‘미술 언어’에 대한 고민을 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예전에 사고가 길을 틔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즘에 미술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많이 해. 최근 서동진 교수님 수업 ‘이미지 비평’을 듣는데 토론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거든. 이런 것처럼 예대넷이 하는 생각들을 뉴스 레터도 좋지만 미술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준
생각의 탄생에서도 방법론을 제시하기는 하거든. 상징물 수집도 방법론 중에 하나인 것 같아. 상징물을 수집하는 것. 예를 들어 교육이 산업에 종속화되고 있다고 하는 것들이, 상징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징물을 수집해서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겠지.
Q. 예술 활동 (작품 판매, 공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1%의 예술가들을 제외하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술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다. 첫 번째, 탈 예술 하기. 두 번째, 삶을 유지하는 노동과 개인의 예술 활동을 분리하기. 세 번째, 지원 사업에 지원하는 것. 여기서 세 번째만 본다면, 공적 지원은 공적 기금을 사용하므로 예술가들에게도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을 도구주의적으로 사용한다는 비판도 의미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떻게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을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그렇다면 예술 대학에서는 커리큘럼이 예술 창작과 실연 중심의 커리큘럼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방향성 역시 중요하게 생각되고 이를 바탕으로 양자가 재정립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강사법으로 강사가 많이 사라진 이래 예술 대학의 교수는 0.41%*의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세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 예술대학생이 예술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단순 수적 계산
짱소
동의하고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의 <공공성>을 예술 대학들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어. 또 저번에 준이 이야기했던 예술대학 수업의 커리큘럼의 대안이 적어도 미술 대학에서는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현대 예술의 방법은 기술적 교습이 아니라 생각의 길을 틔워 주는 것. 학교에서 수업은 얄팍한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준이 제안했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이 나는 마음에 들어. 1년 차에는 파운데이션 과정, 2~3년 차에는 실기 60 대 이론 40의 비중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실기는 문제 설정의 방법으로 개인 작업 진행하고. 교수는 미술사 내 흐름과 참고 작가들 위주로 조언해주고. 이론은 미술계내 종단(미술사 내), 횡단(동시대) 이슈 검토를 위해 미술사와 현대 문화사회학의 이슈들로 구성하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 3~4년 차에는 현장 중심 수업 과정을 거치는 거야. 전시 기획, 지원 사업 수행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 문화, 예술 교육 등 으로 구성하여 현장성을 보강해야 할 거고.
Q. 요즘 사실 예술이 그렇게 의미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예술의 기능성에 대한 비판보다는 내가 하는 것에 대한 반향이 없을 때 스스로의 실망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그렇게 이미 작동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 개인적으로는 예술이 예술로 끝나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같이 나눠보고 싶다.
짱소
이 질문을 들으니 박이소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어. “나는 벽에 걸린 내 그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유희적인 요소나 재미적인 요소를 가져오는데 집중한다. 이 말을 들으니 의미가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준
예술이 예술로 끝나지 않는 방법이, 예술이 뭔가를 해야 한다 라는 것보다는.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에 가까운 것 같아. 그것들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게 짜증이 나. 그딴 거 없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상품일 수도 있고. 굿즈에서는 상품 미학을 잘 한 거잖아. 나쁜 것도 아니고. 상품이 아닌 그 반대도 있단 말이지. 예술은 노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비판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지. 공론장의 역할이 있는 거지. 두 가지 중 어느 게 맞다 라기보다는, 한 쪽은 되게 극단적 상품화 축, 또 하나는 극단적 공론장의 축 . 사람한테 질문을 거는 거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술이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만 되게 판타지이지 않나? 예술이 예술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는 문화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실제로 유럽 같은 경우에는 졸업 전시나 행사가 그 지역의 중요 축제가 되기도 하고. 지역 주체들과 협력해서 과정들을 만들면 되지. 안 하는 이유는 뻔한 것 같아. (능력이 없어서) 못 해서 (의지가 없어서) 안 해서… 독일은 졸업 전시가 공동체 축제처럼 생각되기도 한다더라고. 미술 > 도시계획 속의 미술 > 새장르 공공 미술 이 공공 미술의 과정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요즘에는 공공장소보다 공공 영역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의미인 것 같아. 공공 영역이라고 하면 사회학에서 이야기 했던 공동체의 일종의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이라고 이야기 해. 그런 이론적 내용을 조금 다루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 데 아쉽네? 그 사람들이 참여 안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