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과학 89호 블랙리스트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문화과학사, 2017년 03월
스터디 기간 : 2020년 7~8월
내용
<블랙리스트와 유신의 종말>
본문 읽기 :
박근혜는 문화계의 진보 좌파 세력의 영향이 너무 커 문화계의 새 판을 짜기 위해 미르재단의 설립에 나섰다. (pg.35)
Q1. 왜 하필 문화예술계가 진보 좌파적이라고 생각했을까? 문화예술계가 어떤 영향/권력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검열하려고 했을까? 사회에서 문화예술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해미
표현의 자유랑 직결된 것이라 그런 것 아닐까? 언론도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직군이긴 하지만, 언론이라는 것 자체가 패트론이 있고 그런 것에 의해 검열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조직인 반면에 예술가는 검열을 받긴 하지만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에 더 반발심이 강한 부류잖아.
라임
맞아. 언론은 회사라는 게 존재하고, 개인으로서의 언론인은 별로 없긴 하지. 기자는 신문사에 소속이 되어 있고 이런 것처럼. 보수언론, 진보언론 등 확실히 언론사별로 정치색이나 성향이 뚜렷한 편이고. 그러다 보니까,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진보적인데 보수적인 언론사에 들어갔어, 그럼 위에서 개인의 가치보다는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이도록 검열이 들어올 거 아냐. 월급을 받으면서 검열이 일상화되는 거지.
해미
언론사는 처음부터 새끼 기자로 들어가게 되고, 어떤 일련의 수순을 거친 후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압박이 있으니 더 검열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언론사 같이 이슈메이킹을 하는 닷페이스, 씨리얼 같은 유튜브 채널에 관심을 가지게 돼. 자기들끼리 합의된 주제와 가치에 대해서 말을 하고, 기업이나 그런 곳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개인이 후원자로서 그 가치에 함께 하고, 이 소비자층과 자신들의 언어로 소통할 방법을 가진 이런 새로운 활동들을 보면 이 또한 예술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영상 표현 기법 등을 봤을 때도 그렇고.
짱소
나는 이 문화예술계 자체가 원래 진보적인 것 같아. 기존에 있는 것을 타파하고 나아가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하거든. 박근혜 세력도 그런 성향을 견제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세월호… 예술가가 했던 역할들이 그들을 비판하는 역할이었고 타파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니까 두려워서 블랙리스트가 작동한 게 아닐까.
라임
자기들이 두려워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역으로 공포심을 주려는 거지. 강아지들이 무서우면 역으로 엄청나게 짖는 것처럼. 그런데 그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있어서 그게 예술가들에게 실질적인 생계 위협으로 작용한다는 게 아이러니해. 음, 갑자기 궁금해진 건데 문화예술계가 진보적인 건 위에서 돈을 주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일까??
해미
계약 관계가 정해진 것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닐까?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면 발언권이 제한될 수도 있잖아. 이에 비해 예술가는 대부분 지속적인 계약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고. 물론 그게 이점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편 박근혜는 어릴 적,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문화예술계의 저항을 봐 왔기 때문에 그런 일종의 공포심이 촉발되었던 것은 아닐까.
짱소
박정희 때부터 박근혜 때까지 흘러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게 가시화된 거고 그저 계속 반복되어온 거다, 동의해.
해미
가령 예술과 비슷한 형식의 저항 도구인 언어와 비교해보았을 때, 언어의 경우는 적대적인 게 딱 느껴지는데 예술은 해석의 여지가 많으니까 좀 더 강하게 제재를 가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어. 사람들에게 어떤 기폭제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니까. 그리고 본문 내용 중에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 검열이 심해지니까 더 세련되게 안 걸리게끔 비판하는 스킬이 늘어나고 어떻게든 검열을 피할 구멍을 찾아 나갔다는 부분.
짱소
문화예술계는 반성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이런 자본주의나 가부장제 같은 구조가 보편적인 거라고 생각해오는 걸 깨버리려는 그 시도나 실천 태도들, 그런 게 문화예술이 가진 힘인 듯.
라임
근데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분명히 있는데... 예를 들어 문학을 공부하면, 시를 하나하나 다 뜯어서 배웠잖아 학창 시절에. 미술의 경우도 명화를 보면 이건 어떤 걸 표현한 거고, 이건 어떤 걸 표현한 거고... 이런 식으로 배우다 보니까 사람들이 문화예술 작품을 봤을 때, 그 비판과 저항의 의미를 스스로 꺼내어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어.
해미
이데올로기지. 문화예술계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보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을 해봤을 때, 감상자의 주체적인 해석-참여를 요구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 극도로 추상화된 표현 방식은 정치적인 액션으로는 애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많은 대중의 주체적 참여를 끌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해석에서는, 어릴 때 배우는 것이 머리에 많이 남고 체화가 될 것 같아. 어쨌든 진보든 보수든 교육에 있어 하나의 의미를 고집하여 주입하는 식의 교육은 좋지 않은 듯하고, 이게 사회 실천적 의미였어-라고 미리 ‘주입’하는 것도 좋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듯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교육 방식이 근본적으로는 필요한 것 같아.
라임
맞아. 시나 소설에서 ‘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문장에서 보라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이런 식으로 시험에 맞춰서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정답을 알려주는 교육이 문제 같아. 왜 이런 단어가 나왔을까 하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해. 정답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해.
해미
예술가만 좋은 예술을 만들겠다고 해서 좋은 예술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도 함께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좋겠어.
라임
정답을 강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해미
책에서의 ‘보수척결’. 물론 (한국의 시대적 상황+텍스트 안에서 말하는 것이) 어떤 ‘보수’인지는 알겠지만, 무언가 이 두 개의 개념이 애당초 함께 갈 수 없는, 한쪽을 없애야만 온전하게 되는 것처럼 그려지는 느낌이었달까. 그보다는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가 만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본문읽기 :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본 “악의 평범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강조한 보편성과 평범성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말들은 나는 시키는 것만 했을 뿐이다라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옹호하는 말로 들릴 수 있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누구나 상황이 되면 저지를 수 있고, 그 행위는 결코 특정한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오해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오해 중의 하나는 이거에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말하려던 것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에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 하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 하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는 뜻이에요.’
“악마적이기보다는 뭔가 터무니없이 멍청한 이야기”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안 것 말이다. (pg.45-46)
Q2. 학교에서부터 학생들은 의결권이 없고, 예술학교는 학생들에게 '현장'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어.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라는 구조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 아닐까? 학생들도 그냥 구조를 답습만 하고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학교에서부터 학생 자치가 가능한 방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Q3. 16년에 예술대학 학생회들이 “예술대학생 시국회의”라는 이름으로 약 30여개의 학생회들이 입장을 내고 뭉쳤으나, 17년도에 신임된 학생회들은 이 이슈에 대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 시국회의가 와해된 적이 있어. 이런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그런데, 분명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혐오는 청년들에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 그러나 이것들이 사회변화의 추동력으로는 이어지지는 않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타자화를 이겨내고 우리는 공동의 전선을 어떻게 구축하고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그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일까?
라임
악의 평범성을 가진, 그냥 문제를 계속 모른 채 살아가는 학생들과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학생들 어느 쪽이 더 많은 것 같아? 어느 쪽이 더 문제일까?
해미
우리는 관료제에 편입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학습받았잖아, 이를 이겨낼 방도가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와 분노의 감각을 묻고, 무기력의 상태로 관료제 사회로 들어오게 돼. 그래서 두 부류가 나뉘는 것 같지는 않고, 양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 같아. 대신 어느 쪽을 더 나의 필요(스스로가 느끼는 당위)에 의해 끌어오느냐의 차이겠지.
준
몰라서 안 하냐 vs 아는데 안 하냐...
해미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거지. 그런데 이게 또 그러한 것의 구체적인 예시를 모르는 것으로 이어져 불합리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게 돼. 두루뭉술하게만 이를 인식하는 거지.
준
17년도에 학생회장들이랑 모였을 때 함께 모여서 뭘 하고 싶은데 반응도 싸하고, 내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더라… 불합리함을 아주 가깝게 감각, 체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검열을 느끼는 건 예를 들어 교수님의 취향에 맞춰서 작품을 한다던가, 지원사업에서 기관의 입맛에 맞는 기획을 한다든가 하는 거에서 출발할 수 있겠지. 일상에서 깨달아야 해.
라임
학생회는 학생자치를 담당하는 의결기구라 생각해. 근데 학생회가 지금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학생회부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그렇다고 학생회만 바뀌면 되느냐 하는 생각도 들어.
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사고하지 않으면 곧 악이 된다는 게 핵심이잖아. 학교라고 하는 곳이 언젠가는 끝나니까, 정해져 있으니까, 문제들을 봐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그런 의미에서 학생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우리나라에서 보면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유예하더라. 바쁘니까 잘 생각을 안 해. 그래서 대학에서 새로운 고민들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학생회가 그런 분위기, 풍토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지만 그런 곳이 요즘 많이 없는 듯 해 보이지. 그래서 요즘 나는 학생회 연구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가, 다른 정치철학자의 개념을 빌리자면 자크 랑시에르 개념이라는 정치와 치안에 대한 이야기야. 정치와 치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보면 치안은 사회를 유지하는 행정, 안전을 유지하는 일이지. 지금의 정치라고 하는 건 공동의 몫을 분배하는 일, 고로 치안에 가깝다는 얘길 했어. 각자의 경제적 몫을 정의롭게 나누는 것과 같이. 그 말인즉슨 지금 학생회는 정치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치안을 하고 있다는 거지. 어떻게 아무런 문제 없이 학생회 사업할지 이런 생각만 하고, 여러 의제들, 젠더, 노동 이슈들도 그냥 장식적으로 소비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얘기가 나왔던 건데, 그렇다면 학생자치가 가능한 방식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한 것 같아. 학생회들이 하는 게 학생자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동아리들이나 학생 모임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거 같고, 그런 의미에서 기대하는 건 특별위원회 - 인권위원회나 연대체들. 그들의 활동을 좀 더 확산할 필요가 있고, 그들이 학내에서도 인정받아야 하는 것 같아. 경험에 볼 때, 총학생회장 정도 아니면 학교에서 대화를 안 해주더라고. 대다수의 학교 관계자들이 학생회장 통해서 와라, 그런 말을 하는데 그 구조를 깨나갈 필요가 있어. 학생회의 제도적 지위 보장이 필요하고 그걸 통해 학생회 역량 강화, 그리고 이런 이슈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유빈
성인권위원회는, 내부에서 위원장분들께 부담이 가장 많이 가고 있는 구조야. 성평등센터장님이 전달하는 위주지. 사실상 교내에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난 구성원이지마는 우리 위원회는 문제를 처리하고 인식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비중이 더 큰 것 같고 정치성은 약한 것 같아.
준
결국 학생회가 일종의 민주주의, 현장, 의결권 민주주의를 위한 장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네. 학생회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나? 학생회는 그냥 학생 복지나 그런 역할을 더 잘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한국의 근대적 특수성인가. 다들 생각이 어때?
라임
학생회는 말 그대로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구조잖아. 그래서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덜 들 것 같다. 왜냐 벗어나면 끝이니까. 오히려 학생회는 그냥 복지나 해라 싶기도 해. 복지위원회로 이름 바꾸고... 민주주의 이런 건, 학교가 협조를 해줘야겠지만, 차라리 학교가 학생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학생회 만든 거였으면 지금의 학생회는 복지 기구로 빠지고 라운드테이블, 학교의 그런 담당자들이 있고, 학생들이 자원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주기적으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네. 이건 학교가 학생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겠지만.
해미
비슷한 생각이야. 학생회가 선본 통해 임기 1년 유지하면서 근시안적인 걸 처리하는 거에만 중점이 가 있는 것 같아. 복지랑 학생회 자치랑 아예 분리되는 것보다는 학생회라는 것에 제도적인 지위를 보장하고 학생회 자체의 역량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학생회라는 것 자체가 몸집이 더 커지면 좋지 않을까? 마치 정당처럼, (앞의 준의 발언 중 특별위원회의 역할과 이어질지도) 어떤 사안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단체가 나서서 하나의 선본처럼 되는 형태가 이상적일 것 같아. 임기는 내년에 유지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이러한 압박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좀 더 자신들을 어필할 학생 자치 방법 같은 것들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고. 투표에 따라 퍼센트별로 의석이 주어진다고 생각해보면, 다수의 학생이 어떠한 사안에 대해 논의해보고, 투표하는 공론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거 같고. 학생의회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준
학생회를 내각제 형태로 하자는 말이구나. 학생회 모델에 대한 연구들이 필요한 것 같아. 학생 연구 진행하면서 고민이 들었던 것은, 학생회가 ‘회’ 형태니까 입학하자마자 자동으로 가입되는 형태잖아? 그래서 거기서 발생하는 게 왜 너희가 마음대로 대변하냐 나를, 이런 문제들이거든. 그래서 요즘은 그냥 조합 형태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어. 가입할 사람들을 따로 구하는 게, 노조처럼 하는 게 더 나은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 잃어버리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얻을 것도 많지 않을까?
해미
노조라는 것이 ‘노동자의 권리 일반’을 보장하기 위한 단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노조에서도 노조에 가입하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하되, 비노조원과도 함께 갈 방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학생회의 가입 형태로 되어도, 결국 (학생회 집행부와 뜻이 맞지 않아) 학생회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들과도 함께 가는 방안이 필요해. 그래도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어. 너무 넓은 사람이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 의사라는 게 불분명하고 그걸 설득하는 과정이 당장은 (지금의 ‘작은’ 학생회로는) 힘들고 소모적이고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만약 가입 형태로 한다면 가입률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필요할 듯하네. 최선은 공론장이 많이 활성화되어서 학생회에 대한 자동 가입은 유지하되, 세부 사안에 대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 같고. 우리 학교 노조의 경우에도 학교에 취업하자마자 자동 가입되는 형태지만, 그 안에서도 개개인이 다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전보다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어. 학생회뿐만 아니라 조직에 있어 이런 것들이 고민이 돼.
준
학생회라고 하는 게, 제도적인 것에서 오는 걸 수도 있을 거 같아. 한 명이 좋은 사람이면 되게 좋거든. 지금 학생회 말이야, 한 명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형태, 그런 방식을 탈피할 수 없을까? 같이 만들어가는 경험이 또 중요하니까. 공도 과도 한 사람이 책임지는 형태가 잘 되면 좋지만 안 되면 최악을 너무 많이 보는 제도 아닌가 싶어. 공론장 많이 여는 건 동의해. 이거 한다고 오겠어? 그런 단편적인 판단보다 어떻게 더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법치가 작동하고 있지만 그걸 대중과 연결하는 방식이 공론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또다시 그게 제도로 이어지게 쌍방향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지.. 이런 공론장을 많이 여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네. 학생회에서도 필요하고 예대넷에서도 필요하겠다. 그게 부담스럽지 않게 가볍게 시작하면 좋을 것 같고.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 실태 분석 : MB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본문 읽기 :
바우만이 보기에, 홀로코스트가 가능했건 ‘사회적’요인은 바로 관료제라는 현대성의 특수한 발명품에 있었다. 그가 분석한 관료제의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은 “꼼꼼한 기능적 분업”과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이다. “꼼꼼한 기능적 분업”으로 인해 관료제의 위계질서 안에 있는 대부분의 직원들은 칸막이처럼 쪼개진 업무만을 담당하게 되며, 이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최종 산물’로부터 ‘실제적·정신적 거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는 바로 이러한 거리두기와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바우만의 설명을 빌리자면 “명령의 선형적 위계가 과제들의 기능적 분할 및 분리에 의해 보충되거나 또는 대체되면 사라지거나 또는 상당히 약하된다. 그렇게 되면 기술적 책임성의 승리는 완결되고 무조건적인 것이 되며, 그리고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 결과 “행동의 외적 연관들이 시야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됨으로써 관료집단의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즉 관료제 하에서 칸막이처럼 쪼개진 채 업무를 진행하며 발생하는 관료들 사이의 실제적·정신적 거리두기 효과 때문에 상급단위로부터의 명령체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분산되고, 결국 그 누구도 그 명령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업무만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기술적 책임성’이 더욱 강조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료제의 특징 때문에 발생하는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관료적 조작의 대상들의 비인간화”이다. 즉 “대상들을 순전히 기술적인,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로 표현할 가능성”인데, 이러한 비인간화를 위해 관료적 조직은 대상들을 “순수한 양적 척도들로 환원”시킨다. 다시 말해서, 대상들에 대한 모든 인간적 요건들을 삭제시키고 오로지 ‘양적’인 수치들로만 채워 넣는다는 뜻이다.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리적 명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들은 일단 기호로 환원되고 나면 이런 능력을 잃어버린다.” (pg.78-79)
Q4. 예술대학 내에서 관료제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졌던 사례와 본인이 이를 대처 하거나 대응하기 위해 실천했던 행동이 있는지(혹은 해보고 싶은 행동이 있는지) 그리고 학교 밖에서 이뤄지는 학생(혹은 청년/시민)자치 활동과 학교 안에서의 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짱소
계원예대 재학생으로서… 송수근 씨가 총장이 된 그전까지는 학교는 일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블랙리스트 주도자가 딱 예술대학 총장이 되는 걸 보니까 이 구조와 사회가 잘못됐다는 게 딱 와닿았고… 총장이 새롭게 부임하는 데 학생들의 의견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잖아. 그런 걸 보면서 관료제의 구조가 저런 건가? 하고 생각했어. 당사자의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되고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이 관료제인가…
해미
학생회가 이렇게 될 위험이 있지. 학생회라는 곳이 친한 사람들끼리 등 떠밀려 하는 것이고 기피하고 싶은 곳이 되었거든. 열정페이 집행부 속에서 분업을 민주적으로 하긴 힘들고, 학생들도 시간이 부족하니 각 부서에서 일 처리 후 보고하는 구조라서 분업을 맡은 개인한테만 책임이 돌아가게 되거나, 공동책임이었지 하는 말 안에서 누구의 책임으로도 되지 않는 공백이 생길 수 있어. 학생 조직뿐만 아니라 여러 청년/인권 단체에서도 그럴 수 있어. 가장 일상적으로 느끼는 건 학교 행정 시스템이지. 전화 돌려막기 같은 행동으로 학생들의 권리가 많이 침해받고 있잖아. 개개인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왜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돼.
짱소
행정 하니까 생각난 게, 수강 신청 때 행정 오류가 있어서 시간이 늦게 열렸거든. 항의하던 학생들은 수강 신청에 늦어서 피해를 봤어. 근데 행정 측은 번복할 수 없다는 말만 하더라고.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구조에 대한 문제를 더 지적해야 할 것 같아. 처음에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조가 지금은 부작용을 생산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해미
재난에 대한 비교 글을 본 적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래에서 위로 검토받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독박을 써야 하는 구조라서 재난이 해결 안 된대. 외국의 경우 개인의 책임 판결 아래 해결이 가능하고 유도리 있게 해결 가능하고.
짱소
학생회가 중요하다는 걸 요즘 느껴. 학교랑도 소통하고 학생들이랑도 소통하는 쌍방향 소통을 잘 이어주고 끌어내야 하는 단체 같거든. 근데 학생회 내에서도 민주적이기 힘들다는 걸 들으니 학생회 내에서부터 고민이 많이 필요한 것 같네.
라임
학교의 관료적인 성격을 타파하기 위해 해보고 싶은 게 있어?
짱소
학생회… ㅋㅋ 앞서 얘기한 고민을 함께 하고 싶은데 연대가 많이 필요하겠지.
해미
학생회랑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같이 행동을 하고 제안하는 단체… 독립기구? 단과대 내의 특별위원회 같은 거.
라임
삼권분립처럼 작용하는 거로?
해미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근래는… 소위 말하는 간식 행사를 위한 학생회처럼 작용해서 잘 안 되는 듯해. 예산에 있어서는 빡빡해지고 액션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학생회가 되었어. 학생회가 의무를 태반하고 관료제를 답습하고 있고.
라임
우리가 하는 고민을 어떻게 하면 학생회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짱소
조직해버리기..
해미
개개인으로 얘기를 해 보면 문제가 있지 않아. 다들 취지 공감하고 하는데… 학생회를 통해서 이행하는 걸 꺼리는 것 같아. 학생회가 죽어간다고 느꼈던가 개개인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운동을 독립적으로 한다는 그런 생각 때문) 학생회를 하면 너무 지쳐버리기도 하고 남는 것도 없고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고.
라임
학생회가 학교와 학생 사이의 소통을 잇는 일 그 외에 하는 것이 많은 느낌도 있어. 그래서 지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학교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별로 없을 것 같은 데서 오는 무기력함도 있겠지. 학교가 완전 관료주의적이니까 그걸 그냥 학생들에게 전달해, 라는 구조잖아. 원래의 목적은 흐지부지되고. 또 학생들이 학생회에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그런 일들도 너무 많고... 우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학생들의 요구는 많고... 이건 학교가 학생회에 중간 관료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지 않은 거야. 학생들의 요구는 많은데 학생회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지. 균일하지 않게 열린 소통구조,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겠지. 이런 무분별한 소통은 소통이 아닌 것 같아.
해미
학생회 개혁에 있어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과 인원이 겹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일 것 같아. 네트워크가 구성이 잘 되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인적 네트워크. 교내 단체, 교외 단체의 소통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말이야.
짱소
나는 학교 안 학생이면서도 학교에 관심이 없었어. 근데 예대넷 활동을 하다 보니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하나 싶어졌고 다시 학교 안에 들어가서 목소리를 내야 하나 싶다. 사람이 연결되는 게 가장 중요한 듯.
라임
학생회랑 학교 밖 단체랑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답은 프락치..? ㅎㅎ
해미
단체나 단체의 연결이, 결합하게끔 만드는 건 ‘운동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거 아닐까? 단체에 속해있지 않은 개인이라도 오면 좋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향후에 활동가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근데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목소리를 계속 내는 게, 관료제는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있을 수 있는 문제니까 거기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게 중요하지. 거기서 예술의 특수성을 많이 알리고, 각자도생을 타파하고 같이 대응 방안을 모색해보고 하는 게 유인책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야. 운동의 방식도 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 SNS는 소식이 엄청 빠르게 업로드되고, 그거에 대해서 자신의 의사 표현을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특성들이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방식이기도 하니까, 운동방식 또한 같이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짱소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최근에 친구를 만났는데 학원에 성희롱하는 남성이 있었다고 해. 그래서 많은 사람이 두 달 정도 피해를 봤다더라고. 대표에게 말도 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조치를 해야 하지 않아? 했더니 그런 피곤한 일을 하고 싶지 않고 나가고 싶다고만 말해서 좀 씁쓸했던 기억이 있어. 그래서 단체 외 개개인이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런 연대와 지지가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한 듯해. 또 학생자치 토론회에서 예술 행동이 새로운 운동방식이 될 수 있다고 얘기가 나왔었는데, 타고난 재능에 따른 창작이 아니라 현장에서 누구나 참여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창조성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맥락에서 예술 행동이 중요할 것 같다.
해미
가끔 집회를 가면 페인트로 휘갈겨 쓴 플래카드를 보면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설치예술 같다고 생각해. 자신의 감정이 담기고 자기 결정이 담긴 표현방식이잖아. 예술도 형식적 완결성보다는 목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써 작동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각자의 역할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시스템 속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게 무기력이고 관료제 답습이고 방관이고. 다들 각자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라임
그런 공고한 관료제가 조금이라도 깨진다면, 목소리를 낸 사람들에 의해서 깨지는 거라면, 사람들이 목소리 각자 내는 거에 탄력을 얻을 것 같아. 근데 진짜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나부터 드네, 회의도 들고.
짱소
기후 위기에 따른 얘긴데 나는 개인의 신념에 따라 실천하는 비거니즘이지만 가끔은 무기력을 느끼기도 해. 동물권 같은 얘기를 보면 요즘은 안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런 태도나 실천은 계속 이어나가고 싶고 그래...
해미
나는 분명 바뀌고 있다, 하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 노동 쪽 시민단체에 활동하던 경험에서 당장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 하는 게 아쉬움을 느꼈고, 비건도 포함해서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단체 내부에서도 관심을 두는 사람들도 생기고 조금이나마 뿌듯하고 빨리 바뀌지 않아서 답답한 건 있지만 페미니즘 진영을 봐도 이제는 조금씩 바뀌는 게 보여.
라임
“정상적인” 스펙트럼 외의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네. 내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명ㅋㅋ을 가지자!
Q5. 정치적-사회적으로 작동하여 사태로 번졌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전 사회가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문화예술계에 속해있는 예술대학은 그에 비해 잠잠했지. (오늘 세미나를 위한 관련 텍스트를 읽고 난 후) 블랙리스트 사태를 인지하기 전과 후의 느낌은 어떻게 다르고, 학교 밖에서 이뤄지는 학생(혹은 청년/시민)자치 활동이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관행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해결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해미
수능 준비 할 때는 그냥 관심이 없었지. 그리고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 다니는 맛에 그냥 다녀서 블랙리스트에 관해서는 또 관심이 없었고.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 개념이 국가적으로 탄압당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부터였어. 무서웠어. 국가랑 개인은 차이가 있는데 국가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고 나를 감시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국가의 공식적인 발표뿐이잖아.
짱소
나는 학교에 송수근이 총장으로 오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어. 그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러고 나서 총장 취임식 때 그쪽 권력을 쥔 사람들은 놀자판이었는데 옆에 학생들이 막 반대 시위하고 있는 걸 보고 나도 조금 무서움을 느꼈어. 그 권력과 부조리함의 상징인 송수근이 학교에도 침식하듯 들어오는 걸 보고 무서웠던 것 같아. 그리고 나선 그냥 분노로 끝나지 않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
라임
나는 약간 좀 그런 생각이 있어. 운동이라는 게, 두 가지 맥락으로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진행해나갈 코어 층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들만의 판, 고여가는 느낌은 지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얕고 넓게 관심을 유지해나가는 사람들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 예대넷이나 미대의 외침 같은 운동 단체들처럼 지속해서 실천해나가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학생들도 행보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해서 나아갈 수 있을까?
유빈
선행사례가 있을까?
라임
페미니즘이나 N번방의 사례를 봤을 때 대중들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언급하는 것들이 가시화와 운동 실천에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생각해. 운동을 주최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관심 가지고 찾아보고 분노하는 메시지 서로 표출하고 했던 것이 가해자들이 계속 눈치를 보게 만들고 결국 조금씩 변화를 불러오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 영향을 줄 방법은 이 두 가지인데, 굉장히 어려운 것 같네.
짱소
내 경험으로 들어봤을 때, 나는 학생 자치 활동에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예대넷에 들어왔고 그 다음에 학생 자치 활동에 관심이 생긴 케이스인데, 그런 걸 돌아봤을 때 일단은 나한테는 생각의 변화랑 행동의 변화가 둘 다 있었어. 생각의 변화에서는 일단 예전의 나는 내가 당사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 같아. 왜 학생인 내 의견은 반영이 안 되지? 이런 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고. 근데 이건 행동의 변화가 있었기에 (예대넷 활동) 생각의 변화도 같이 따라온 것 같아. 주체의 목소리를 내는 감각이 쌓이다 보니까 더 주체적인 학생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야. 또 행동이 중요하다고 느낀 게, 내가 비건 지향하는 것도 … 그전에는 기숙사 살 때 비건식이 전혀 없었는데 그때는 그냥 싫다, 여기서 얼른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지만, 지금은 아 이건 문제가 있고 구조를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유빈
하지만 주체적 발언하는 기회를 얻기까지가 어렵더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발언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실 근데 원래 사람이 발언할 때는 성공의 기대나 경험이 중요한 것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초반에 시행하는 사람들의 딜레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학교에서 단체 활동 비슷한 거 하면서, 사람들 참여를 높일 방법이 - 딜레마가 되기는 하지만 - 운동의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이런 이미지가 카드 뉴스 같은 게 가벼운 이미지로 병행되는 게 좋은 효과를 가져왔던 것 같아. 이런 걸 병행할 수밖에 없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발언의 성공을, 주체성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발언하는 사람들이 갈려 나가는 구조, 그것 또한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고민이 들어.
해미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경험에 던져지게 된 것은 특수한 경험일 수도 있고, 행동하겠다고 선택하는 것 또한 필요성에 의해서 선택을 하는 것 같은데, 두 경험 자체가 보통 학생-청년 대중이 선택하기에는 (경쟁 사회에서)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해. 먼저 당사자성에 대해서 본인이 인식/체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지금 우리에게는 당사자성이 좀 더 필요해. 블랙리스트도 좁게 보면 문화예술계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관료제 등 많은 문제와 이어져 있잖아. 문화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닌 거지. 이를 생각해봤을 때, 모든 문제가 이어져 있다는 감각에서 나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학생으로서 사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학교 안에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일단 일상적으로 나의 당사자성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 혹은 연대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해. 학교 안의 문제는 학교 안의 사람이 직접 바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유빈 말처럼 행동하는 데에도 내 시간 나의 비용을 들여서 할 가치가 있냐 하는 게 큰 것 같아. 생각하는 습관 자체가 안 들여지게 자라왔기 때문에 분노보다는 무기력이 많이 학습되어 있을 것 같고. 너무 이른 나이에 대한 이야기이긴 한데, ‘성미산학교’라고 지역에서 직접 주민들이 대안학교를 만든 사례가 있어. 거기에서는 우리 지역의,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엇일지 학생 선생 학부모가 함께 이야기해. 그걸 우리 선에서 어느 정도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래서 나는 습관이 어린 시절부터 조금 더 들어와야 하지 않나 싶어. 또 다른 예로는 유럽에선 학교 교육 시스템 내에서 노동조합에 대해 배우면서 노동자로서의 나의 권리를 어떻게 지킬지, 기업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싸울지, 이런 일종의 실습 과정이 있대.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현대 한국 검열의 계보학 :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검열과 문예진흥정책을 중심으로>
본문 읽기 :
알다시피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가 내전과 학살을 통해 성립되면서 제정된 악법 중의 악법이다. 특히 1948년의 제주와 여수·순천 등에서의 민중 봉기는 법 제정의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pg.84)
Q6. 국가보안법은 중요한 검열의 근거 중 하나이지만, 개인의 경험에서 이것들을 일상에서 체감한 적은 별로 없잖아? 아무런 시민활동이라 참여활동을 해본적이 없는 상태에서 20살에 군대에 가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었는데,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구호가 대통령 공약으로 나왔을 때, 안보를 지키던 입장에서 솔직히 과격하다고 생각도 했었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역사적 맥락과 제도적 효력의 발휘가 배경지식이 없는 현 세대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은데, 그런데 이런 세대들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중견 세대가 되면 이러한 악법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좀 무서워서야. 또한 비단 이러한 상황이 국가보안법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검찰개혁이나 공수처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요즘 주로 당사자 정치가 핵심인 것 같은데 중요한 부분이지만, 시민성 근거 없이 피해자의 언어로만 이야기 하는 방식이 일종의 한계성도 느껴진달까 그런 생각이 들어. 세대이음, 당사자 정치, 시민성 등등 여러가지 이슈가 섞여서 여러 생각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듣고 싶어.
준
쉽게 요약해보면 기성세대들이 국가보안법을 문제라고 하는데, 사실 체감되지는 않잖아, 우리세대는. 그럼 그 악법들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고. 운동에 관해서 세대 흐름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해미
혹은 우리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우리 문제를 어떻게 우리 세대 이후의 세대에게 설득(공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
유빈
근데 나는 사실 그런 문제를 생각하면 어느 순간 결국 예전에 운동하셨던 분들도 지금 와서는 그대로 기득권이 되어서 또다시 문제를 발생시키는 상황이 생각나. 그래서 나중에 내가 나중에 내가 했던 것에 대해 남에게 설득한다는 게 꼰대가 되어서 또 내가 대응했던 문제에만 머무르고 후세대의 문제는 보지 않고 그러지 않을까 고민이 돼. 설득이라고 하면, 그게 가능은 한가? 옳은 것인가? 내가 했던 것을 부정하게 된다는 거, 그건 굉장히 어려울 것 같네.
해미
일단 당사자가 있는 사안이라면 당사자가 코어 집단이 되는 것(당사자가 직접 발화하고 운동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거기에 더 많은 사람을 붙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그 문제가 더 큰 담론과 연결이 될 때 가능한 것 같아. 검찰개혁, 공수처 같은 것이 좀 더 큰 문구 아래에서 운동으로 그려진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근데 당장의 문제는 이러한 표어들이 근본적으로는 다른 문제들과 이어져 있는 맥락을 지워내고 앞에 내세워진다는 것?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같은 문제점(원인)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설득에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 한편, 서로의 존재나 정체성을 인정받고 말고의 갈등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서로 돌아서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는 고민이야.
준
이게 특정 단어나 이슈에 관한 게 아니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는 게, 하나하나의 키워드에는 공감이 안 될 수 있어. 그러나 가령 정의로운 사회라고 했을 때 이것에 공감하고 연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좀 더 폭넓고 공감 가능한 키워드 중심으로 가야 할 것 같아.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 세대의 도래를 바라는 데 그럼 권력을 내려놓을 것인지? 이전 세대와 현세대의 결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고민이 있어. 나는 문화연대가 그래서 좋았어. 내가 가진 문제들과 고민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가 된 느낌? 어린/오래된 세대라고 단정 짓지 않고 동등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솔하게 토론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야겠네..
해미
물론 특정 문구를 내보일 때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잡는다면 (혹은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결집 효과를 노릴 수 있으니까. 검찰개혁 같은 경우 박주민, 표창원 같은 민주당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내세워졌고, 부모님 세대들이 많이 동하신 것 같아. 인물 정치지.
본문 읽기 :
블랙리스트 사건이 일면 남한 공안세력이 냉전문화를 되살려 정권 안보에 이용하려 한 준동의 결과지만, 다른 한편 독자 생존이 불가능한 문화예술 영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 배제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고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독과점도 극심해지면서, 독립적이고 비상업적인 문화예술은 독자적인 생존과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따라서 공공의 자원과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으로 되는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오히려 재원을 가진 기관의 권력이 더 커지고 간섭과 억압도 용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는 언제든 다른 형태로 반복될 수 있다. (p.91)
Q7. 일민미술관 입법극장 <시각예술가는 뭘로 돈 벌어요>의 뒤풀이 자리에서 이 맥락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어. 누군가가 파라다이스 재단(블랙리스트 책임자 송수근을 총장으로 임명한 계원학원의 모기업)의 지원사업을 받으면 안된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그리고 한 명이 “블랙리스트 문제라고 하는 건 알겠는데 나의 일상에 와닿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특히 시각)예술가들이 작업의 내용으로 노동, 젠더, 난민 등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그래야만 현대 예술이라는 시각을 견지하는 한편, 실제로 정치적 행동들과는 거리를 둔다"라는 이야기로 이어졌어. 또 다르게 내가 청년 예술 관련 내용으로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한 자리에서는 “국가가 먼저 나서서 검열한 사례가 있는데 예술로 불편한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라고 이야기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 물론 예술가들의 궁핍한 삶이 가장 문제이겠으나, 과연 그것 때문만이 문제일까? 다른 원인이 있다면 무엇일까?
라임
패배주의가 답습된다고 생각해. 저항해봤자 안될 거라는 생각 말이야.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합쳐져서 사회가 굴러온 것 같아. 자기가 탄압당했던 적은 없는데도 왜 사람들이 이걸 답습할까? 특히 젊은 사람들.
준
내가 읽었던 글 중의 하나는 우리 세대가 한번 삐끗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경험이 있어서 그렇다더라고. 오히려 예전에는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급성장 할 수 있었는데 요즘 우리 또래는 한번 삐끗해버리는 게 두려운 상황이잖아.
라임
청소년 때는 선생님들이 수능 실패하면 너네 인생 실패한 거라고 하잖아. 이걸 실패한다고 해서 하나의 낙인이 찍히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들이 관련한 겁을 주며 학습을 시키더라.
유빈
공포가 학습된 것이 무기력의 주원인이니까 분명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준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면이 있는 한편 이 불안한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멘토 같은 게 잘 팔리잖아. 주로 그게 평소의 권위 있는 (부모/선생) 사람의 영향이 큰 것 같아. 예대넷도 그런데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거나 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믿을 수 있는 좋은 선생님, 좋은 지식인을 만나는 경험이 필요한 것 같네.
해미
우리 세대와 기성세대 하면 생각나는 게 있는데, 우리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보는 게 가족, 선생이잖아. 어른이 아이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기제가 깔려있고. 이와 비슷하게, 세대 간의 차이에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윗세대가 이끌어주어야 한다, 아랫세대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지. 이 두 집단 간의 관계 맺음이 (한쪽이 자라게 되며) 그 파이(보호함, 알려줌 / 보호받음, 배움)가 달라져야 하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이와 비슷하게, 경험해보지 못한 개인과 어떻게 관계 맺음을 해야 하는지 활동 연차가 쌓이면서 고민이 되는 부분이야.
준
간접적으로 이해를 돕기... 내가 못 겪어본 것들은 어떻게 하면 간접 경험해 볼 수 있을까?
해미
엘리트주의 같은 것도 학습된 거지. 이론 수업의 경우, 학교 와서 배우는 게 실천과 현실에 대한 지식보다는 ‘앎’을 위한 지식이고. 가령 민중미술의 비중보다는 예술사의 지식, 이론을 더 배우고… 현실에 적용해보는 경험이 부족해.
준
이론 과가 아니었지만 그런 걸 배우지 못해서 아쉬웠어. 근데 정책 쪽으로 들어가면 바꾸기 너무 어려울 것 같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는 활동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중…
해미
한편으로는 이미 사회에 진출하여 경제적인 기반이 있는 선배 예술가들이 후배 예술가들의 실천적 활동에 대해 후원을 해 주면 좋겠어. 우리의 행동에 관심이 있고, 응원한다. 당신들의 방식으로 함께한다는 의미로.
준
동의. 그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만나고 접속할 수 있을까?. 후원 같은 것들이 잘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심이 없어서? 아니면 여건이 안 돼서? 어쨌든 이를 위한 연결 방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아.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정책의 실체와 문제점>
본문 읽기 :
대통령 ‘말씀’만이 아니다. 매년 문체부 업무계획을 메우고 있는 정책들, 사업들도 그 사업이 도출된 배경이나 경위, 시행의 정당성이나 근거, 목표나 방법 설정, 예산 및 기금 운용계획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행정조직의 규모나 업무영역이 확대될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블랙리스트처럼 비밀에 부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블랙박스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문화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문화행정조직의 쇄신은 국민을 앷부터 배제하고 있는 ‘정책적 결정’의 관행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정책 영역에서의 블랙박스를 없애는 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국민은 단순히 문화정책의 구경꾼도, 수혜자도, 소비자도 아니다. 정책이 개개인의 삶, 공동체의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유용한 조건, 수단, 과정 그 자체라는 관점에서, 대통령의 ‘말씀’이 우선하고, 주무부처의 조직논리나 공무원의 이해관계, 그리고 잘 짜야진 사업계획과 예산이 미리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견고한 관료제적 구조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문화정책의 곳곳에 포진해 있는 블랙박스들의 봉인을 해제하고 지금이라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토론에 부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기본법」에서 정하고 있는 ‘문화권’이 실질적으로 그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적 결정’에서 국민의 주권자적 지위를 정당하게 복권해 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pg.125)
Q8. 문화정책 내에서의 예술가 자치가 가능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관료제의 극복, 거버넌스의 구체적 형태에 대한 견해와 방법론이 궁금해.
유빈
질문 계기가, 사실 문화예술인들은 특성상 그래도 사안에 대한 당사자성 잘 느끼는 편이고, 당사자성 없어도 참여가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도 내부 자정, 고찰이 잘 안 된다는 그런 딜레마가 있어서... 외부 문제는 당사자성 잘 느끼고 실천도 할 수 있는데, 생계와 관련된 거에서 오히려 말을 못 하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준
도발적인 질문이네. 나는 우리가 권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나? 우리의 관성들이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위계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게 내 인생에 영향 미칠 정도로 그러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주제로 이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학생 때는 이렇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안 그렇더라고. 사회에 나가서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는 잘 모르니까, 몰라서 더 접근 어려운 것도 있는 거 같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오기도 했고. 실제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느냐 여부보다는 그냥 그게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주고 실제 현장을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공포를 이해하지마는.
라임
생살여탈권에 대한 문제도 이해하지만, 당장 나에게 불이익이 올까 봐 이게 더 두려운 게 아닐까?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내가 이걸 공론화했을 때 내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할까 봐, 그런 두려움 말이야. 내가 나섰을 때 연대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공격이 들어온다던가 이런 것에 대한 공포도 있을 것이고. 당장은 공론화를 했을 때 책임에 대해 끌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좀 더 냉소주의처럼 만드는 것 같아. 그냥 얼른 벗어나면 되지, 학교는 졸업하면 끝이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
준
그런 문화가 중요하다고도 생각해. 고발했을 때 피해가지 않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한데, 없으니까. 미투 운동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같이 고민하는 게 정말 필요하겠네.
해미
당사자들이 공통으로 싸웠다는 경험을 가지고, 이겼다는 감각 또한 있어야 할 것 같아. 우리 학교의 경우,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운동해서 성공했던 경험이 윗세대에는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공동의 경험이 없다 보니 학생총회 같은 것도 단순동원의 느낌밖에 안 나더라. 더 나아가 무엇이 문제인지의 정도조차 공유가 안 되는 것 같아. 무엇보다 대다수 교수의 행태, 과 내에서의 관습이 우리의 무기력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싶어. 선배 라인 타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 교수 라인 중요하다는 이야기, 교수님과 친해서 경험을 더 하면 좋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러다 보니 관료제에 저항하기보다 관료제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 그리고 그게 생존을 위해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문제 같아.
준
관료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거버넌스가 있지. 관료제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만드는 게 중요하겠네. 그런 거버넌스에 지속해서 개입하려고 하는 게 예술가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거 같아. 박근혜 블랙리스트 이후로도 문화정책은 많이 생기고 있잖아. 그럼 거버넌스 형태 만들어졌을 때 참여할 사람 호명하는데 블랙리스트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문제가 되겠지. 그런 감각을 어떻게 중요하게 생각을 할까.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어떻게 생태계를 위한 동료들을 위한 성취로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을 느껴. 어떻게 예술가들이 실질적으로 일어서서 공론화를 만들어내고 문화 행정에 개입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동료들을 이 장에 불러올 수 있을지. 그렇지 않다면 예대에서는 실기, 그 사람 밑에서 아부 떨면서 한자리하는 방식이잖아. 그런 것들을 깰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한 것 같아.